몽골소개

몽골소개

1) 국호 
몽골의 공식적인 국호는 REPUBLIC OF MONGOLIA로써 몽골이란 본래 '용감한'이란 뜻을 지닌 부족이었으나 칭기스칸에 의해 MONGOL 및 지역의 이름 MONGOLIA로 변환되었다. 
몽고라는 이름은 지난 수 천년 동안 북방 민족으로부터 전쟁에 시달려 온 중국 사람들이 몽골을 비하하기 위하여 우매할 "몽”과 옛 "고"를 사용한데서 비롯되었다.

2) 지리적 위치 
몽골은 아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러시아의 토바, 브리야트 공화국과 남쪽으로는 중국의 신강 위그로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면적이 남한의 16배인 약 1,566,500㎢ 인데 남북 거리가 1,263 ㎢, 동서거리가 2,405㎢, 전체국경 선의 길이는 8,114㎢에 달한다.

>>몽골의 인구<<

인구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는 추세로 1998년 3월 몽골 정부 통계로 1960년에 비해 두배가 늘어났으며, 2016년 현재는 3,194,921명이나 인구 증가율은 점차 감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에 비해 인구가 작은 것은 기후적인 악조건과 과거 한때 남자의 40%가 독신 라마승에 달했던 라마교의 영향 때문으로 보고 있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 영아 사망율이 많이 개선되었고, 인구증가를 위해 출산 을 장려하며 모자 보건 시설이 발달되어 있다. 현재도 출산 장려를 권장하는 사회 분위기이지만 도시에서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아이들을 적게 낳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몽골 인구의 특징은 인구 밀도가 낮고 젊은 층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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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기후는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로서 날씨의 변화가 심하고 건조하다. 
긴 겨울(10월-4월)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봄, 여름, 가을이 합하여 겨우 5개월밖에 안 된다. 기온은 지방에 따라 각각 다르지만, 평균적으로 연중 가장 더운 7월에는 12℃~20℃ 가장 추운 1월에는 -15℃ 안 밖이며, 가끔씩 그 이하로 떨어질 때도 많이 있다. 하루 평균 기온이 0℃이상인 날이 연 평균 170~190일 정도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매우 적으며 그 중 65~78%가 여름에 내린다. 연 평균 비가 내리는 날은 15일 에서 20일 사이 이며,비가 적기 때문에 늘 건조한데, 울란바타르시의 연 평균 강수량은 233mm로 서울의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심한 온도 변화로 수도 울란바타르의 경우 겨울에는 영하 35~40℃, 여름에는 영상 25~30℃로 연교차가 세계에서 가장 크다. 긴 겨울과 적은 강수량 때문에 감기가 몽골 사람들의 생활에서 떠나지 않고 농작물 재배가 어려워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유목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외부 활동 가능한 시기가 1년 중 5개월 밖에 안되기 때문에 자연 생산성이 떨어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후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겨울이면 모든 땅이 얼어붙기 때문에 건설, 도로건설, 탄광 등도 불가능하며, 모든 강과 호수는 겨울에 얼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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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오랫동안의 사회주의 폐쇄 정책을 실시해 왔으나 1988년 12월 제 5차 공산당 (인민 혁명당) 총회에서 개혁 정책과 민주화를 추구하기로 결정하였고, 90년 7월 29일 최초로 민주 총선을 실시하여 국회를 구성하였다. 
그후 서방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개선하고자 힘썼고, 그 결과 일본과 미국, 한국, 프랑스, 독일, 영국 등으로부터 경제적 원조를 이끌어 내었다. 
유엔이나 적십자사와 같은 국제기관을 통해 대외 교류 확대를 하고 있으며, 외국의 자본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몇 가지 가시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그 결과 상업 차관의 도입과 인도적인 차원에서 긴급 식량 지원 및 의류, 학용품 등의 원조를 얻었다. 한국과는 1990년 3월 25일 대사급 수교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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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국민 1인당 소득은 $335이나 1인당 국내 총 생산은 $2,185로 국민들의 생활 수입은 낮은 편이나 사회주의 국가의 복지혜택이 자본주의 국가와 다르기 때문에 화폐 가치로 단순하게 비교하기가 어렵다. 
국유 재산 사유화 조치가 91년 5월부터 단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몽골은 지난 70년 동안 정치와 경제 부분에서 소련 연방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다. 대부분의 소비재와 건설재 등을 소련이 공급해주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동맹국가로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지난 89년 소련 연방이 시장 경제로 전환되었다. 동구와 소련의 철수로 몽골은 커다란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공업 및 건설 사업은 예전보다 더 부진한 상태에 있으며 시장 경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작용이 발생하였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극심한 생필품 부족 현상으로 인한 엄청난 물가 폭등과 국가 재정의 부족을 경험하였다.

대개 91년에 비해 식료품 가격은 62배나 폭등하였고 교육비는 무려 89배나 올랐다. 전체적으로 약 51배나 오른 소비자 물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거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의 생활을 동경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 재정도 많은 부분이 해외 원조와 장기 저리 차단으로 메워나가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폭의 재정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새로운 사회 간접 자본 건설을 위한 투자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고 늘어나는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 할 만한 정부 차원의 시도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물가 상승률이 많이 둔화되었고 89년 이후 국민 총 생산이 감소하다가 93년을 고비로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96년의 전년도에 비해 경제가 무려 6.3% 성장하였다. 또한 실업률이 1994년의 8.7% 에 비해 1998년 3월말의 통계 자료는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실업률이 2.6%인 62,744명으로 나타났다. 
1996년 이후의 물가 상승률을 살펴보면 그렇게 두드러진 변화는 없었으나 2016년 3월 현재 100%를 기준으로 볼 때 2015년보다 119%, 2014년 보다 172%의 상승률을 나타냈다. 몽골의 시장 경제로의 이행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곳은 자유시장 (바라니자흐)인데 가장 큰 시장은 일주일에 네 번 모이는데 많이 모일 때는 한번에 약 20,000명으로 하루 종일 출입하는 사람을 모두 합치면 10만명 가량 모인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은 중국제 값 싼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한국 물건도 많이 볼 수 있는데 대개 한국의 두배 가격에 팔 리며 몽골 사람들에게는 매우 품질이 좋은 물건으로 알려져 있다. 1995년 9월에는 조순 서울 시장이 울란바타르를 방문하였으며 서울시와 울란바타르시가 자매 결연을 맺고 울란바타르 시내에 서울의 거리를 신설하였다. 양국간의 무역은 95년의 경우 $4,600만 규모이며 한국이 몽골의 제 4위 수입국이며 수출은 제7위를 기록하고 있는데 양국의 교역은 날로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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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은 칭키스칸으로 인해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고 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를 세워 비로소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원나라(1279~1368)는 순제를 마지막으로 1368년 한민족 계인 명에 의해 멸망했고 그 후 몽골은 고비 사막로 쫓겨나고 13세기의 모습을 갖춘 채 신비한 고립 국가로 남게 되었으며 이후 1616년에 성립한 만주라의 속국이 되었다. 청나라는 비옥한 땅을 모두 빼앗아버리고 몽골인들은 황폐한 초원 지대로 밀려나 유목민으로서의 삶이 더욱 고착되었다. 1911년 한 민족계의 사람들이 청을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웠으며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중화민국이 외몽골은 원래 중국의 고유 영토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외몽골은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국내의 혁명으로 힘을 쓰지 못하자 중국이 침공을 시작하였고 결국 외몽골은 독립을 취소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도 침입해와서 라마교의 활불(달라이라마)을 수반으로 하는 정부를 수립하였다. 나라를 다시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외몽골은 러시아 혁명의 원조를 받아 중국군과 활불 정부군과 맞서 싸워 1921년 수도를 점령하였다. 활불 정부군으로부터 정권을 인수 받은 날이 7월 11일로 현재의 독립 기념일이 되었다. 1961년에 유엔에 가입하였고, 1964년 중~몽 국경이 확정되어 내 외 몽골의 분열이 고착되었다.

1956년 체덴발이 인민 혁명당 서기장이 된 후 당내 친 중국피를 숙청하고 친소련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쳐왔고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 발전을 위하여 힘써왔다. 대부분 국민들은 중국에 대한 국민감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지만 정치, 경제,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의 영향은 매우 깊다. 한편으로는 지난 70년 동안 소련 연방의 사회주의 제도아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현대 몽골인의 생활 양식이나 사 고 방식은 러시아를 본받은 서구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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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목 몽골
사회의 모든 면모가 유목에 의해 조성되어 왔는데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몽골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자원 때문이 아니라 유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 주었다. 평균 이하의 강수량과 기온에서 극심한 변화로 특징지어지는 복잡하고도 고도의 기술이 요하는 환경 적응의 과정이 바로 유목인 것이다. 
유목은 일정한 구역의 한계 없이 매우 광활하게 매년 장소를 이동해야 하는 직업이다. 환경학적으로 매우 제한된 구조의 몽골 환경에서는 농사가 적응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유목은 몽골 사회에 다양한 초원의 자원을 활용하는데 용이하다. 유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동성이다. 한 곳에서 일 년 동안 사람 과 가축을 생존하게 하는데 충분한 자원을 제공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목을 농사와 함께 할 수 있는데 이는 안정적인 풀과 오아시스가 있는 곳에서 가축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한 제한된 노동력을 사용할 수 있다. 
유목사회는 공통적으로 일정한 틀이 없다. 즉 문제를 극복하며 위협을 피하고 지구상에 축적된 대상인 정착에 별 가치를 두지 않으며 이동성에 가치를 둔 민족으로 발전되었다.

2) 보건 몽골 
사회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사회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병원들이 많이 지어졌으며 의사들의 수도 많은 편이다. 의사 1인당 진료 인구는 403명으로 한국의 855명의 반밖에 되지 않지만 출생 1,000명당 영아 사망수는 한국의 21명보다 세배나 많은 60명이다. 의사의 질적인 수준은 매우 낮은 편이다. 
1990년 시장 경제로 전환이후 러시아의 의약품 보급이 중단되면서 극심한 의약품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UN과 서방 국가 정부, 국제적십자사 등에서 긴급 구호 차원에서 약품들을 보내긴 하였지만 아직도 거의 대부분의 병원이 처방은 주지만 약품은 공급하고 있지 못하며 몇몇 의료장비들이 있어도 낙후된 것이거나 고장나 있는 상태이다. 
몽골 사람들 가운데 가장 흔한 병은 신장염과 고혈압 증세이며 피부병과 결핵이 널리 퍼져있다. 치아가 정상적인 사람들이 드물지만 시설을 갖춘 치과 병원은 거의 없고 세라믹으로 인공 치아를 만드는 기술이 없다. 아이들은 감기와 폐렴에 늘 노출되어 있다.

3) 교 육 
97%의 높은 문자 해독율을 보유하고 있는 몽골은 1924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근대 교육이 도입되었다. 1990년 이후 자유민주주의 제도로 개혁하면서 교육부분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가장 큰 변화는 사립 교육 기관의 자유화, 학과 편성의 자 유화, 일부 국립 교육 기관의 사유화 등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전교육 과정이 무료였으며 국가가 직접 관장해 왔는데 국가재정 형편이 심각한 위기에 처하면서 많은 부분에서 공립 교육 기관을 사립 교육 기관으로 이양하는 단계에 와있고, 교육 환경도 점차 나빠지고 있다. 
다른 부분의 개혁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육 발전이 뒤쳐져 있으며 교원들의 급여수준 도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현재 몽골의 교육 기관은 총 930개이며 전 인구의 21.4%인 482,000명 이 어떠한 교육 기관이나 학교를 통해 배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중학교에 418,300명, 대학교에 40,400명이 배우고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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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종교 현황은 샤머니즘/정령 숭배가 약 50%, 라마불교가 26%,회교 약 4%,기독교 약 0.03%~0.11%정도이다. 현재 울란바타르에 39개, 지방에 39개의 교회가 있으며 그 중 3곳은외국인 교회 (인터내셔널 교회, 한인 교회, 중국인교회 ) 이다. 기독교 신자는 어린이를 포함하여 7,440명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중 16세 미만의 어린이 비율이 36%이다.

1) 샤머니즘 
몽골은 샤머니즘이 번성한 지역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중앙 아시아의 혹독한 생활 환경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생활 가운데서 샤머니즘에 젖게 만들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심성도 샤머니즘에 녹아들었다. 샤머니즘은 몽골 역사 초기부터 13세기 혹은 16세기까지 몽골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종교로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샤머니즘은 몽골인의 심성 깊숙이 자리잡고 있고 생활 곳곳에서 그 영향이 나타나고 있다. 샤머니즘은 칭키스칸 시절 즉 초기 몽골 제국 시절에는 국가 무당이 전쟁에 관하여 충고함으로써 막강한 세력을 발휘하였고 국가 종교로 인정되었다.

칭키스칸은 "우리 몽골인들은 우리의 생사가 달려 있는 유일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다. "라고 말한바 있다. 하나의 강력한 최고의 신개념은 유라시아 초원의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퍼진 사고였다. 몽골인들은 텡게르( TENGER )라는 유일신을 믿었다. 텡게르(TENGER) 라는 개념은 '하늘 의 신','하늘의 힘센 지도자'라는 뜻이다.. 무속의 다른 기초 기능들에는 예언, 점, 그리고 잃어버린 가축이나 물건 을 찾는 것이었다.

무당들은 춤과 노래 그리고 심지어 마약의 사용 등을 통해 황홀경에 빠져든다. 어떤 이들은 의식에 앞서 굶기도 한다. 지금도 어느 곳을 가든지 '어버'라고 하는 성황당 같은 것이 널려져 있다. 여전히 무당들이 있으며, 지방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하다. 젊은 사람들이 점을 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고 있으며 최근도시에서 점술 강좌가 인기를 끌고 있다.

2) 불 교(올랑 보다니 샤씬) 
위그르족을 통해 문화와 함께 불교가 유입되었다. 칭기스칸은 티벳형 불교를 선호하여 샤머니즘과 함께 불교식 예배도 드렸다. 몽골이 세계적 제국으로 변함에 따라 샤머니즘은 국가 종교의 위치를 불교에 양도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채택하여 정신적 통일을 이루려 했듯이 쿠빌라이칸은 불교로 원나라의 정신적 통일을 추구하였다. 또한 불교의 특성상 국가 권력과 상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원나라의 제국 붕괴시 불교는 다시 약화되었고 오늘날 중국식 불교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박물관이 한 개소 있을 뿐 이다.

3) 라마불교(샤르 샤씬) 
라마 불교가 처음 몽골에 유입된 것은 1230년대 오고타이때다. 그 후 세조 쿠빌라이가 1253년 티벳을 점령했을 때 당시 라마 불교의 동자 승려인 파스파를 초청하였고 그가 세조의 존경을 얻어 라마 불교는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파스파는 티벳어를 기준으로 하여 몽골문자의 기원이 되는 파스파 문자를 제정하였다. 몽골의 라마 불교는 티벳형 불교와 샤머니즘이 혼합된 양상을 보인다. 대부분의 경전이 몽골어로 번역되지 못했고 간단한 입문서 정도만이 소개될 뿐이다. 아직도 대부분의 라마법회는 티벳어로 진행되며 참석 한 대중들은 거의 그 의미들을 모른 채 예식에 앉아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여전히 지방에서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는 라마 승려에 대한 존경은 깊다. 티벳 불교는 수도원 식이다. 몽골이 공산화되기 전인 20세기초 외몽골에는 그 나라 부의 20%를 움직이는 583개의 수도원과 사원 건물을 갖고 있었다. 거의 모든 몽골의 도시들은 수도원이 있는 자리에서 발전했다. 당시 울란바토르로 알려졌었던 후레는 몽골의 가장 뛰어난 살아 있는 부다의 직위에 앉았다. 이는 성직 계급에서 달라이라마와 펀첸 라마 다음에 오는 세번째 것이다.
1970년대 초 100명의 승려들의 공동체인 간단 수도원이 울란바타르에서 열렸다. 이 사원은 몽골에서 유일하게 활동하는 수도원이었다. 소수의 지역 수도원은 박물관으로 남았고 간단 수도원은 박물관으로서 관광 명소였다. 그들 승려들에게 5년간의 훈련기간을 마친 많은 젊은이들이 포함되었는데 그들의 동기나 선택의 이유를 물어도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는다. 라마 불교는 이미 이 나라의 역사, 전통예술, 그리고 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뿐 아니라 정치에 이르기까지 간여하고 있는데 굳이 동기를 새삼 생각할 필요를 느끼지 안는다. 
불교와 불교 승려들은 항상 중앙 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 해왔다. 몽골에 있는 불교 사원도 예외가 아니다. 사원과 국가는 서로를 지원하고 성육신의 교리는 성육화 된 살아 있는 부다들로 하여금 강력한 몽골의 귀족 가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

4) 회 교 
회교는 카자흐족이 주로 믿는데 주로 몽골의 서부 지역에 분포하며 수니파 회교도이다. 울란바토르시에도 7,000명 가량의 몽골 국적의 카자흐 인들이 살고 있으며 수도에서 30Km 떨어진 날라이흐시에도 회교도들이 4,000 ~ 5,000명 있으며 회교 집회소가 있다. 현재 몽골안에 모슬렘 교도를 위한 회교 집회소는 약 5개소로 추산되고 있다. 카자흐인들은 생활 속에서 체득된 습관적, 명목적 모슬렘이 대부분이고 영지적인 저항이나 신앙적 의식은 희박한 편이다. 따라서 모슬렘의 확산을 막고 개방 적인 모슬렘 선교를 희망하는 이들에게 몽골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가치 가 있는 지역으로 평가되고 있다.